맛있는 음식, 짧은 여행, 편안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이처럼 소소하고 당연한 것들이 ‘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그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을 꿈꾸는 당신에게, 달콤한 휴식이 되어 줄 두 편의 그림책을 소개한다.

 

<수영장>(2013)

<수영장>, 2013년 作
2015년 뉴욕타임스의 ‘주목할 만한 아동도서’,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 ‘올해의 어린이책 금상’을 받았다


부드럽게 밀려와 몸을 간질이는 물결, 수면 위를 가로지르는 헤엄, 이따금 첨벙대며 튀는 물방울, 주인공이 수영장을 찾으며 바란 건 이런 한가로운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수영장은 사람들로 미어터질 듯 바글거린다. 고함도 왕왕 울려 퍼지고, 기대했던 휴식은 도저히 취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틈에 끼어 발만 간신히 담그거나 그대로 떠나버리는 대신, 주인공은 사람들을 헤치고 물 밑으로 내려간다. 시끌벅적하던 소리는 물에 잠기고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이 밀려온다. 그리고 판타지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된다.


수영장은 어느새 신비로운 생명체가 숨 쉬는 깊은 바다로 변해 있다. 온통 먹빛이던 세상은 이제 푸른 물빛을 띠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한 누군가가 또 있음을 알게 된다.


때로는 많은 말 없이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둘은 서로의 이름을 묻는 대신 산호초 사이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펭귄과 물고기를 따라 헤엄도 친다. 흰 수염이 물결의 방향대로 흔들리는 거대한 고래의 눈도 들여다본다. 수영장 아래에서 보낼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던 환상적인 시간이 꿈처럼 펼쳐진다. 지친 일상이나 와글와글한 수면 위쪽은 이미 다른 세계 이야기인 양 저만치 멀어져 있다.

출처 - NYCB Gallery
<수영장>의 내용을 온전히 담은 영상
영상도 좋지만 실제로 그림책을 찾아 넘겨보기를 추천한다


여행이 매혹적인 건 언젠가는 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서의 시간이라고 다를 건 없다. 짧고도 강렬했던 휴식은 아쉽게 끝이 나지만, 수면 위로 올라온 주인공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무채색인 세상에서 홀로 빛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뒤따라 올라온 친구 역시 마찬가지다. 물 아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만의 색깔을 선명하게 띠고 있다. 어쩌면 주인공의 일상은 그 자체로 판타지의 연장선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안경을 벗은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마치 책장 밖의 우리를 향한 것처럼 느껴진다.

 

 

<문>(2017)

<문> 북 트레일러
<문>, 2017년 作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는 <문>에서 좀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려진다. 사람들 사이에 벽이라도 세워진 듯 삭막한 거리, 주인공은 누군가 흘리고 간 열쇠를 줍는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열쇠를 찾는 사람은 없고, 조그맣고 붉은 벌레가 허공에서 윙윙댈 뿐이다. 기다렸다는 듯 길을 인도하는 벌레를 따라간 길의 끝에는 문 하나가 있다. 오랫동안 잠겨있던 듯, 거미줄이 잔뜩 드리워진 문이다. 주인공이 주운 열쇠는 바로 이 문에 완벽하게 맞아 들어간다.

출처 - 그림책 박물관


삐그덕, 먼지 냄새를 풍기며 문이 열린다. 슬쩍 들여다보니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모두 색깔을 지닌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져 있다. 쭈뼛거리며 들어선 주인공은 그곳에서 어찌 보면 기묘하고 어찌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는 존재들과 마주친다.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 아래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는 동안 주인공의 얼굴은 점점 더 해사해진다. 그 사이 들판에 널린 수많은 문으로는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


생김새도 언어도 모두 다르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달콤한 시간은 솜사탕처럼 금세 녹아버리고 다시 문밖으로 나올 시간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다. 문을 잠그는 대신 살짝 열어둔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슬었던 녹이 지워지고 끈적끈적한 거미줄이 사라진 문은 언제까지나 그곳에 있을 것이다.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게, 또 문을 발견한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게.

<Room>, 이지현 作


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그린 건 이지현 작가다. 서울의 일러스트레이션 학교 HILLS에서 공부한 작가는 졸업 작품으로 <수영장>을, 뒤이어 <문>을 탄생시켰다. 단어 하나 없이 그림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가 이야기에만 온전히 집중하게 되는 건 재미있게도 이러한 구성 방식 덕분이다.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인물들이 나누는 이야기, 그들을 둘러싼 소음, 공간의 촉감 같은 것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이 우리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환상적인 놀이공원 ‘네버랜드’가 등장하는 <네버랜드 미아>
김기정 작가가 쓰고 이지현 작가가 그렸다


새로운 세계로 가는 통로는 너무 소소해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울 만큼 일상적인 곳에 섞여 있다. 그만큼 발견하기도 쉽지만, 거미줄과 녹이 암시하듯 그 안쪽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드물다. 이 작품에 전 세계 독자가 마음을 사로잡힌 걸 보면, 이러한 판타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단순히 우리나라만은 아닌 모양이다.
문을 발견했을 때, 안쪽으로 들어갈 용기가 사치품이 아닌 세상. 현실에 매인 것이 많은 우리는 언제쯤 그런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오늘도 달콤한 휴식을 꿈꾸며 일상의 쳇바퀴를 열심히 달렸을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선물하고 싶은 이유다.

표기되지 않은 사진 출처 이지현 블로그 

이지현 블로그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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