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베스트셀러 2위에 올랐다. 2016년에 비해 페미니즘 서적의 판매량은 2배가량이나 증가했고,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은 23만 5천 372명의 동의를 얻어 정부로부터 사회적 논의를 약속받기까지 했다. 2018년 새해엔 법조계와 문학계, 연극계까지 미투 운동이 번져가고 있다. 희망적인 일이다.

 

2018년 개봉한 한국영화 포스터, 왼쪽부터 <골든슬럼버> <흥부> <그것만이 내 세상>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돌려 영화관을 향하면, 그곳엔 여전히 조폭과 형사와 사기꾼과 범죄자 역할의 남자들로 가득 채워진 포스터들이 줄지어 붙어있다. 2017년 내내 우리는 조폭과 형사가 대결하고, 남과 북의 남자들이 뜨거운 감정을 나누며, 남자와 남자가 힘을 합쳐 거대 권력에 맞서는 영화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서점에 제아무리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페미니즘 서적들이 높게 쌓여 있었다 해도 말이다.

앨리슨 벡델의 만화 <Dykes to watch out for>


그래서 벡델 테스트(Bachdel Rule)를 떠올려봤다. 무려 30년도 더 전인 1985년,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만든 아주 간단한 테스트. 영화에 최소한의 젠더 개념이 반영되어 있는지를 가늠하는 테스트로 다음의 세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해야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

첫째,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둘째,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셋째,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얼핏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조건이다.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여자가 대화를 나눈다는 이 쉬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할 영화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보았던 영화들을 가만히 머릿속에 떠올려 보면 ‘어라?’ 싶어진다.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좀처럼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족 사투리 유행을 낳았던 ‘장쳰’(윤계상)도, 택시운전사 ‘김만섭’(송강호)과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의 국적과 언어를 초월한 우정도, 남한과 북한의 두 ‘철우’(정우성, 곽도원)간의 의리도 아직 생생하건만, 여성 캐릭터가 등장했던 장면은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당신의 기억력을 탓할 필요는 없다. 작년에 흥행했던 한국영화에는 애초에 그런 장면이 없었으니까.

2017년 한국영화 흥행순위


2017년 1월 1일부터 2017년 12월 31일까지의 관객 수를 기준으로 흥행순위 10위까지의 한국영화를 살펴본 결과,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단 두 편뿐이었다. <군함도>와 <강철비> 두 편. 정말 감사하게도 <군함도>에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둘이나 등장한다. ‘이강옥’(황정민)의 딸 ‘이소희’(김수안)과 ‘에이바’(이정현)가 그 둘이다. 에이바에게는 나름의 캐릭터와 서사가 있고, 이 둘은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에게 의지도 하고 군함도에서 탈출하기 위해 함께 힘을 합치기도 한다. 하지만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해서 군함도를 섣불리 여성 중심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그 둘은 중심인물이 아니며, 그들의 고통은 불필요할 정도로 자극적으로 영화 내내 전시된다. 특히 성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영화 <군함도> 속 에이바와 이소희


<강철비> 초반에도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대부분 클리셰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나 후반부에 가면 마치 처음부터 그런 캐릭터가 없었다는 듯이 종적을 감춰버린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이처럼 벡델테스트를 통과한다고 해서 페미니즘 영화라는 것도 아니고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라는 것도 아니다. 여성 캐릭터가 중심에 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이 정도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영화에 익숙한지 알려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세상의 반은 여자인데, 모든 여자에겐 저마다 자신의 이름이 있는데, 영화 속에선 이름을 가지는 것도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이토록 힘이 든다니.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


2017년 한국영화 관객 수 1위에 빛나는 <택시운전사>에서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택시운전사 ‘김만섭’(송강호)의 딸, ‘김은정’(유은미)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두 여자의 대화 장면 같은 건 러닝타임 두 시간 동안 단 한 개도 없다. 실제 역사가 어떠했든지 간에 이 영화 안에서만큼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영화 <신과 함께>의 한 장면


신의 가호가 함께한 듯한 괴력의 흥행을 보여준 <신과 함께>는 또 어떤가. ‘초강대왕’(김해숙)도, ‘태산대왕’(김수안)도, ‘송제대왕’(김하늘)도 ‘덕춘’(김향기)도 여성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대화 주제는 줄곧 ‘자홍’(차태현)에 관한 것이다. 심지어 자홍의 ‘어머니’(예수정)는 영화 내내 이야기의 중심에 있지만 ‘자홍의 어머니’일 뿐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감내하며 평생을 바친 전형적이기 짝이 없는, 그저 ‘어머니’로만 존재하는 여성. ‘엄마라면 이래야 한다’는, 자식의 시각에서 본 엄마 캐릭터. <불효자는 웁니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그 시절 그 감성 그대로다.

<공조>에는 ‘강진태’(유해진)의 아내인 ‘박소연’(장영남)과 처제인 ‘박민영’(윤아) 그리고 딸인 ‘강연아’(박민하)까지 무려 이름을 가진 여자가 세 명 이상이나 등장한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처제인 박민영은 ‘림철령’(현빈)에게 반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고, 박소연과 딸 강연아는 영화 후반부에 급기야 납치까지 되고 만다. 그나마 있는 박소연과 박민영의 대화는 오로지 강진태(유해진)와 림철령(현빈)에 관한 것이다. 그들 자신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범죄도시> <청년경찰> <꾼> <남한산성>으로 갈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범죄도시>에는 다방에서 일하는 ‘안혜경’이 그나마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이지만 각종 폭력의 피해자일 뿐이다. <청년경찰>에서는 이름조차 없는 수많은 여성이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두 남자 주인공이 슬랩스틱 코미디를 벌이고 있는 동안에도 이 여성들은 그저 그들의 구조를 기다리며 죽어간다. <꾼>이나 <남한산성>에는 심지어 이름을 가진 여성이 한 명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더킹>의 안희연 검사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그나마 몇 명 등장하는 <더킹>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싶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 간의 제대로 된 대화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안희연’(김소진) 검사나 ‘박태수’(조인성)의 아내로 나오는 ‘임상희’(김아중)가 내뿜는 강렬한 매력을 생각했을 때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장면


그나마도 아쉬움을 달래주는 건 (10위 안에는 들지 못했지만) 흥행 순위 11위의 자리에 당당히 올라선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존재다. <아이 캔 스피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열 편의 영화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저 여자는 이름이 있나. 저 여자는 또 다른 여자와 언제쯤 마주치려나. 둘이 대화는 하려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찰나에 나타난 참으로 단비 같은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희망. 이 영화가 없었다면, 2017년 한국영화에서 희망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남성 중심적인 한국영화들의 틈바구니에서, <아이 캔 스피크>는 제목 그대로 여성인 우리도 “말할 수 있다”며 소리치고 있었다고나 할까.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의 한 장면


하지만 영화 <아이 캔 스피크> 하나에 만족하기엔 2017년 흥행한 한국영화들의 벡델 테스트 결과는 참혹하기 짝이 없는 게 사실이다. 영화배우 문소리가 본인이 직접 연출하고 출연한 <여배우는 오늘도>라는 영화를 들고나온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벡델 테스트 결과를 받아 들고나니 “한국영화 죄다 조폭 아니면 형사”라는 이 영화 속 대사에 속 시원하게 웃기가 참 힘들다.

역대 한국영화 흥행 순위


혹시 2017년 만의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역대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부터 10위까지도 살펴보았다. 설마 했던 기대는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 첫 번째 테스트부터 통과하지 못하는 영화가 수두룩. 마치 남성 중심의 서사가 천만 관객 영화의 필수 조건인데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착각이 들 정도다.

2018년 2월 18일 기준 역대 한국영화 순위 1위부터 10위까지의 열 편의 영화 중에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도둑들> <암살> <광해> 그리고 <부산행>까지 네 편. <광해>에서는 광해를 해치려는 음모를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 ‘정 상궁’과 ‘사월이’의 대화 장면 딱 하나가 있어서 간신히 벡델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부산행>도 벡델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기는 했지만,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여자가 아무리 대화를 나눈다고 한들 그 둘이 좀비에 맞서 싸우기보다 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모습으로만 등장했던 걸 생각하면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영화 <도둑들>과 <암살> 포스터


그나마 다행인 건 <도둑들>과 <암살>의 존재다. <도둑들> 속 여성 캐릭터들은 이름을 가진 것을 넘어서 각기 맡은 역할이 분명하고 서로 간의 상호작용도 있다. <암살>에서는 독립운동가 ‘안옥윤’과 ‘아네모네 마담’은 물론, 안옥윤(전지현)의 쌍둥이 자매 ‘미츠코’(전지현)가 나온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 안옥윤은 영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안옥윤’에 대해 검색을 해봤을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대중들이 남성 중심의 영화를 원하기 때문에 남성 중심의 영화만 만들어지는 것일까. 남성 중심의 영화만 만들기 때문에 대중들은 남성 중심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만약 이 땅의 영화 제작자들과 감독들이 남성 중심 영화를 원하는 대중들 탓이라고 말한다면 하는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마음속에 벡델 테스트를 담아둔 채 영화를 보는 수밖에. 여성이 영화 속에 얼마나 등장하는지 어떻게 등장하는지 의식하는 것만으로 닭이 먼저든 달걀이 먼저든 이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조폭과 형사만으로는 영화 만들기 힘든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영화 관계자들이라면 대비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ANSO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