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1770∼1827)은 중세부터 현대까지에 이르는 서양음악 전반을 총칭하는 클래식의 광의로나 근대 초입 고전음악을 가리키는 협의로나, 또는 클래식을 잘 모르는 이에게나 즐기고 사랑하는 이에게나 클래식을 대표하는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교향곡 5번 ‘운명’이나 9번 ‘합창’,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바가텔 25번 ‘엘리제를 위하여’ 등 베토벤이 남긴 주옥같은 명곡들뿐만 아니라, 요제프 칼 슈틸러가 남긴 ‘베토벤 초상화’의 강렬한 인상, 청력을 잃게 된 운명의 한계를 딛고 일어선 ‘악성(樂聖, 음악의 성인)’으로서의 스토리 등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를 그린 영화들을 살펴보며 영화 속 베토벤과 베토벤의 음악들을 조명해봤다.

 

<댄싱 베토벤>

Dancing Beethoven | 2016 | 감독 아란차 아기레 | 출연 주빈 메타, 오스카 차콘, 줄리앙 파브로, 길 로먼, 말리야 로먼
<댄싱 베토벤> 스틸컷

영화 <댄싱 베토벤>은 프랑스가 낳은 세기의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1927~2007년)가 1964년 선보인 베토벤 교향곡 제9번 D단조 ‘합창’에 대한 대형 발레 공연을, 2014년 베자르의 사후 초연 50주년 만에 도쿄에서 다시 재현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베자르가 창립한 스위스 ‘베자르 발레 로잔(Béjart Ballet Lausanne)’과 일본의 도쿄 발레단(The Tokyo Ballet; 東京バレエ団)이 안무를 맡고 거장 주빈 메타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Israel Philharmonic Orchestra)가 음악을 맡았다.

<댄싱 베토벤> 예고편

혁신적인 안무 동작과 획기적인 아이디어, 파격적인 무대로 무용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평가받는 베자르에게 있어서도 베토벤 교향곡 9번은 뜻깊은 프로젝트였을 것. 실제로 베자르는 인류애와 환희를 표현한 교향곡 9번 ‘합창’이 “무용을 위한 최고의 명곡”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아란차 아기레 감독은 베자르 발레 로잔에 대한 8년간의 취재를 바탕으로 다양한 인종 및 국적으로 구성된 총 350명가량의 무용수들과 교향악단의 도전과 노력을 담아낸 작품이다.

<댄싱 베토벤> 포스터

특히나 4개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9번처럼 4개 챕터로 나뉜 영화의 호흡이 교향곡의 하이라이트인 4악장 ‘환희의 송가’ 속 이어질 때의 카타르시스는, 또 다른 전설적인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 속 기괴하고 주술적인 극적임과 대조되는 밝고 경건한 에너지로 가득 채워진다. 교향곡 9번이 완성됐을 때의 베토벤은 이미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을 만치 청력을 잃은 상태였기에 이 위대한 음악의 황홀한 시각적 형상화는 만일 “듣지 못하는 베토벤이 살아생전 이 공연을 봤다면.”이라는 특별한 가정을 떠올려보게 한다.

 

<카핑 베토벤>

Copying Beethoven | 2006 |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 출연 에드 해리스, 다이앤 크루거, 매튜 구드, 필리다 로우, 니콜라스 존스. 조 앤더슨
<카핑 베토벤> 스틸컷

베토벤이 그 위대한 교향곡 9번 초연 당시 귓병이 너무 심해 지휘마저 불가능했다는 사실과 결국 베토벤을 대신해 공연의 음악감독이 지휘를 했다는 사연은 여러 작가와 호사가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 기록에도 베토벤은 일종의 퍼포먼스로서 단상 위에 섰으며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베토벤 아닌 음악감독의 지휘에 맞춰 연주를 했다고 남겨져 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D단조 ‘합창’ 4악장
정명훈 지휘,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주, 2018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연주
MBC <TV예술무대> 방영

이에 따라 영화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의 지휘 역할을 음악감독이 아닌 한 젊은 여성 카피스트(작곡가가 쓴 악보를 연주용으로 베끼고 교정하는 사람)이 했다는 픽션으로 각색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 속에서 카피스트 안나 홀츠(다이앤 크루거 분)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드 해리스 분)의 교향곡 9번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는 보조자를 넘어 연인으로까지 발전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렇기에 <카핑 베토벤>의 초점은 자연히 교향곡 9번의 초연 장면을 향해 있다. 영화 중반 장장 13분 가까이 연주 장면을 보여줘 104분여 러닝타임 중 가장 역동적이고 감격스러운 장면을 연출해낸다.

영화 <카핑 베토벤> 예고편

허나 교향곡 9번 못지않게 이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베토벤 음악은, 오프닝 크레딧 안나 홀츠의 마차가 들어서는 어지러운 화면과 교차되는 베토벤 현악 4중주 Bb장조 ‘대푸가’이다. 대푸가는 교향곡 9번 이후 베토벤이 완전히 청력을 상실한 뒤 작곡된 곡으로, 음악에 내재된 풍부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 난해함으로 인해 오랜 시간 실패작으로 간주되었으나 20세기 이후 복잡한 형식과 현대적인 감수성을 인정받아 재평가된 작품이다. 주변의 소리로부터 음악을 받아들이는 화자 안나의 인물성과 말년의 광기로 가득 찬 베토벤에게 이야기를 안내하는 영화의 불안이 신비로우면서도 혼란스러운 바이올린 선율 속에 내재되어 인상적인 오프닝을 선사한다.

베토벤 현악 4중주 Bb장조 ‘대푸가’
리차드 토네티 & 오스트레일리아 챔버 오케스트라 연주
2016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연주

 

<불멸의 연인>

Immortal Beloved | 1994 | 감독 버나드 로즈 | 출연 게리 올드만, 예로엔 크라베, 이사벨라 로셀리니, 조한나 터 스티지, 마르코 호프슈나이더, 미리암 마고리스, 발레리아 골리노
<불멸의 연인> 스틸컷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이 실제로 남긴 편지들과 이런저런 루머들을 각색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흥미로운 허구를 만들어낸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베토벤(게리 올드만 분)이 ‘불멸의 연인’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과 곡들을 남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음에 이르자, 베토벤의 제자이자 일종의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예로엔 크라베)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 ‘불멸의 연인’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이다.

“나의 천사이자 나의 전부이며 나의 분신인 그대.
잠시 시간을 내어 그대에게 몇 자 적어 보내려고 하오.
내일이 되어야 머물 곳을 알게 될 것 같소.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소.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런 고통이 없을텐데.”

게리 올드만이 연기하는 <불멸의 연인> 속 베토벤의 보다 감정적으로 격앙된 모습과 로맨틱한 면모를 감상하는 것이나, 실제 역사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베토벤의 편지 속 불멸의 연인을 찾아 나서는 미스테리한 줄거리가 이 영화만의 재미 요소이다. 허나 그와 같은 상상력으로 구성해낸 영화임에도 장면 장면마다 베토벤의 음악들을 절묘하게 녹여냈다는 점에서는, 영화 <아마데우스>(1984)를 떠올리게도 한다.

<불멸의 연인> 트레일러

불멸의 연인 첫 번째 후보였던 줄리에타와의 첫 대면에서 피아노 소나타 제8번 C단조 ‘비창’을 우아하게 연주한다든가, 길을 막고 선 귀족들을 강하게 헤치고 지나서며 “그들의 시대는 끝났다.(Their days are over. Your world is finished!)”고 외치는 장면에서 교향곡 제3번 Eb장조 ‘영웅(Eroica)’이 흘러나오는 식이다. 베토벤이 영웅이라고 믿었던 나폴레옹이 대포소리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장면에서는 교향곡 제5번 C단조 ‘운명’ 1악장이 모두가 아는 제1 주제를 감춘 채 제2 주제로 흘러나온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8번 C단조 ‘비창’ 3악장
조성진 연주
2018년 JTBC <고전적 하루> 연주 및 방영

작곡자의 정신 상태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게 바로 음악의 힘일세.
(It is the power of music to carry one directly into the mental state of the composer.)
... 음악이 말하는 바가 바로 이런 걸세.
듣는 사람이 어떻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This is how it is, the music is saying. Not how you are used to being. Not how you are used to thinking.)”

<불멸의 연인> 속 베토벤의 본심은 중반부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A장조 ‘크로이처’가 흘러나오는 중에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이는 음악을 통해 여러 숭고한 가치를 설파했던 베토벤의 명언과 일화들을 배치하는 대사이자, 이를 맥락 그대로 받아들이면 영화 속 ‘불멸의 연인’에 대한 수수께끼처럼 이미 사후 190년이 지난 베토벤의 음악들 또한 영영 미답으로 남을 것을 걱정하게 된다. 허나 생전 베토벤의 진심이 어떠했든지 오늘날 짐작 가능한 베토벤의 불행과 역경, 이를 극복해낸 그의 낭만과 열정만으로도 우리는 베토벤의 음악을 충분히 불멸의 것으로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A장조 ‘크로이처’
바이올린 독주 안네-소피 무터, 피아노 협연 램버트 오키스
1998년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Théâtre des Champs Elysées) 연주

 

메인 이미지 영화 <댄싱 베토벤> 스틸컷

 

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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