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불운한 삶을 살았던 러시아의 발레리노 바츨라프 니진스키. 그의 삶은 자체로 한 편의 극과 같다.

 

초기의 인생


중력을 거스르는 듯 높이 도약하며 무대를 누빈 불세출의 천재 무용가 바츨라프 니진스키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9세에 황실무용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부모님도 무용수였던 그의 몸엔 날 때부터 무용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12세에는 러시아 전역에 알려졌고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삶을 들여다보면 형에게 닥친 사고, 아버지의 가출 및 부모의 이혼으로 불안정하고 궁핍한 생활을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린스키 시절


니진스키는 졸업 후 마린스키 극장에 입단하여 18세에 주역이 된다. 극장에 소속된 동안 공연했던 여러 빛나는 작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발레리나 타마라 카르사비나와 공연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는 전설로 남아있다.
마린스키 극장에 소속되어 있는 동안 그의 공연에 매료된 귀족 출신 후견인이 나타나면서 니진스키는 재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는다. 예술을 사랑하던 그 후견인은 니진스키를 더 훌륭하게 만들어 줄 당대의 공연기획자에게 소개한다. 그 사람이 니진스키 인생에서 절대적 영향을 끼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동성애자였던 디아길레프는 곧 니진스키의 후견인이자 파트너로서 그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디아길레프와 발레 뤼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니진스키(좌)와 디아길레프(우)


니진스키는 자서전에서 디아길레프를 처음 볼 때부터 그가 싫었지만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서 엄마와 형제를 부양하기 위해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일에 있어서 그들은 곧 환상적인 팀이 되어 가는 곳마다 전설을 만들어낸다. 디아길레프는 전설적인 발레단 ‘발레 뤼스(Ballet Russe)’를 만들어 안무가, 예술감독, 화가, 작곡가, 무용가들로 이루어진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미카엘 포킨(안무가), 레온 박스트(예술감독),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작곡가) 등이 함께 작업하며 무용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 야망이 컸던 디아길레프는 발레 뤼스를 이끌고 전 세계 공연 투어를 나서게 되고, 당시 최고의 예술의 도시였던 파리에서 드뷔시가 작곡한 ‘목신의 오후’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등을 초연한다.
니진스키가 안무가로서도 참여한 파리에서의 공연들은 클래식하고 우아한 발레에 길들어 있던 당시 대중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외설적인 몸짓과 의상, 그리고 혁신적인 안무 스타일에 충격받은 청중들 때문에 공연 도중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공연들은 발레 역사에 남는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파리에서의 전설적 공연 ‘목신의 오후’ 프로그램 표지
‘목신의 오후’ 공연 장면
소동을 일으킨 ‘목신의 오후’의 문제 장면
‘장미의 정령’
‘페트루슈카’
Nijinsky, ‘L'Après-midi d'un Faune’ full version(1912)

 

 

디아길레프와의 이별과 결혼

니진스키와 그의 부인 로몰라


디아길레프와 여러 나라를 다니며 환상적인 공연을 계속했으나 그것이 지치고 버거웠던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가 사정상 함께하지 못한 남미 투어에서 그의 팬이었던 헝가리 백작의 딸과 결혼한다. 그의 결혼 소식을 들은 디아길레프는 격분해서 발레뤼스의 모든 공연에서 니진스키를 제외했고, 자신의 권력을 행사해 다른 곳에서도 니진스키가 활동할 수 없도록 철저히 막았다. 디아길레프는 소유물처럼 여긴 니진스키가 자신을 떠나자 완전히 이성을 잃고 광분하였다. 자신의 전부였던 무용을 하지 못하게 된 니진스키는 그 후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말년의 정신분열증

디아길레프의 방해로 무용을 더는 하기 힘들어진 니진스키는 곧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다른 사람과의 소통도 어렵게 되었고, 결국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는다. 저명한 지그문트 프로이드나 구스타프 융에게도 진찰을 받았지만 그들도 니진스키를 고칠 수는 없었다. 그 후 30년을 정신병원에 드나들며 지내던 그는 1950년 60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사망하고 만다. 따져보면 니진스키가 춤을 춘 기간은 고작 10여 년밖에 되지 않지만, 그동안 그는 춤 역사를 새로 썼다. 남성 댄서가 발레리나의 보조 역할밖에 못 하던 시절에 니진스키는 그 위치를 완전히 바꾸어 남성도 주역으로서 무대에서 빛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발레 역사는 니진스키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질 정도로 그의 존재는 강렬했다. 힘든 생을 살았으며 딸 둘을 남긴 채 쓸쓸하게 삶을 마감한 그의 개인사와 달리, 전 세계 무용계에서는 그를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자리한 니진스키의 무덤

 

메인 이미지 출처 ‘Sick Chir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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