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출발하자면, 나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이와이의 작품 속에는 감독 자신이 관찰하고 겪을 수 있을 법한 어제오늘에 대한 미화된 향수가 있으며, 때로는 집착이라고 오해를 살 만치 미성숙하거나 상처 입은 자아에 대한 끈질긴 묘사가 있다. 이 모두를 눈부신 빛과 어지러운 화면, 우아한 클래식과 치기 어린 록 음악을 교차해 표현해내는 독특한 미감도 내가 사랑하는 그만의 인장이다.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그의 미학을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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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스틸컷
일순 스치는 마지막 불꽃놀이를 위해 이 영화는 달려간다

 

어린 영혼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은 줄곧 사춘기 혹은 그 끝자락에 있는 어리고 젊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물론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러 어른이 되었지만 학창 시절의 풋풋한 감정과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기도 하고,(<러브 레터>(1995), <4월 이야기>(1998)) 각기 약혼과 결혼까지 했던 <언두>(1994)의 모에이, <립반윙클의 신부>(2016)의 나나미처럼 아직 홀로 세상에 내던져지기에 너무나 유약하고 수동적인 어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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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스틸컷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하다

영화 인물들은 아직 어림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도움과 보호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래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다른 상처로부터 더욱 취약하다. <피크닉>(1996)의 코코는 영화 시작부터 부모님에게 버림받았고,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1996)의 아게하는 어머니가 죽은 뒤 자기 이름도 모르는 채 매춘부에게 맡겨진다. <하나와 앨리스>(2004)의 앨리스,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의 나즈나 모두 친구들에게 말 못 할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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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스틸컷
고아와 다름없이 버려진 아게하에게 그리코는 유일한 혈족이었다

 

아픔의 강조

아직 어리기에 상처가 금세 아물 줄 알았건만 모든 게 서툴기만 한 이들의 상처와 아픔은 쉬이 벌어지고 더 크고 깊게 파인다. 어쩌면 다소 갑갑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속 여러 인물들의 깊고 외로운 침잠이나 <언두> 모에이의 이상 행동은, 그들에게 아픔이 절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대처할 수 없을 만치 커다란 크기로 이미 바투 다가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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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스틸컷
이와이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직면한 자신의 아픔 속에서 늘 외롭다

<피크닉>,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립반윙클의 신부>의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물론, 하다못해 밝디밝은 묘사와 상상력으로 가득 찬 <하나와 앨리스>, <하나와 앨리스: 살인 사건>(2015), 비교적 담담하고 차분한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4월 이야기>에서도 작은 아픔과 외로움에 어쩔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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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앨리스> 스틸컷
밝고 가벼워만 보이는 앨리스도 남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상처로 힘들어한다

 

감각의 역설

팬들에 의해 붙은 별명처럼 밝고 화사한 ‘화이트 이와이’의 영화가 있고 어둡고 침울한 ‘블랙 이와이’의 영화가 있다지만 실상 그 세계를 가리지 않고 강조되었던 인물들의 고통은, 이와이 감독 고유의 필터를 거치면서 더욱 특별한 장면들로 그려진다. 뮤직비디오나 아이돌 그룹 AKB48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고 3인조 밴드 ‘헥토파스칼’을 결성해 음반 작업을 하는가 하면, 자기 영화의 영화음악이나 원작 소설, 블루레이 커버 아트 디자인까지 직접 하는 등 종합예술인으로서의 뚜렷한 주관과 다감각적인 감성이 그만의 ‘이와이 월드’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와이 슌지가 연출한 뮤직비디오
영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에 나왔던 ‘YEN TOWN BAND(옌 타운 밴드)’의 ‘アイノネ’

학부에서 미술학을 전공한 그답게 이와이는 영상미로 유명하다. <언두>, <러브 레터>, <4월 이야기>,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하나와 앨리스> 등 주요 작품을 함께 했던 시노다 노보루 촬영감독의 생전 함께 완성한 자연광 위주의 따스하고 화사한 색감이 아직까지도 영화마다 살아 숨 쉰다. 아름다운 화면에 위배될 만치 종종 뿌옇게 초점이 흔들리고 인물들 감정 진폭의 크기만큼 어지럽게 요동하는 핸드 카메라의 묘미 역시 이와이의 전매특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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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스틸컷
이와이의 영상은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자연스럽게, 때로는 어둡게 빛의 마법을 부린다

음악 역시 이와이 영화의 중요한 주춧돌이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등의 소심한 몽환과 치기 어린 격정을 오가는 록 음악이 한 축이라면, 마찬가지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삽입되었던 드뷔시의 피아노 작품, 이와이 슌지가 직접 작곡한 <4월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속 단출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피아노곡이나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등의 서정적인 발라드가 또 다른 축이다. 이 같은 서로 다른 음악들이 우리가 예상한 극적 장면을 채우거나 종종 상상하지 못한 순간에 충돌하며 카타르시스를 대변해 강조의 역설(力說)과 반전의 역설(逆說) 모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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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4월 이야기> 스틸컷
주인공 우즈키를 연기한 마츠 타카코는 이와이가 작곡한 영화 속 피아노곡을 직접 연주했다

 

구원에 대한 여운

어린 영혼의 상처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때로 극적으로 과장하면서도 이와이 슌지는 쉽사리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내려주지 않는다. 이와이 세계 속에서는 그 시절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사랑에 매달렸던 주인공들도 사랑을 성취하지 못하기 일쑤고, 사랑 아닌 관계나 심지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파멸이나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들이 꽤나 여럿이다. 허나 화이트 이와이의 희극이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대신 희망의 여운을 남겨두었던 것처럼 블랙 이와이의 비극 역시 그것을 새드엔딩으로 쉽게 결론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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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크닉> 스틸컷
이와이 영화의 결말과 여운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 나비는 언제나 내 영혼의 깊은 곳을 찾는다. / "가능하면 더 깊은 곳을" // 어느 날인가 나는 그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 "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 // "어째서지?" / "잘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들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 // 그리고 그는 날아갔다. (…)

– 김정란, 「나비의 꿈」 중에서

결국 돌아보면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아픈 영혼에 대한 관찰 보고서이자 결론 없는 예찬론이다. 결론이 없다는 것은 곧 “아프니까 청춘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와 같은 어른 입장의 꼰대스러운 교훈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도리어 영화 속 어린 주인공 못지않게 세심한 감성의 이와이 슌지가 결코 아프지 않은 이의 눈으로 이해하지 못할 그들의 아픔을 마치 인상주의와 같은 그만의 시선과 따뜻한 빛으로 기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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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스틸컷

 

 

 

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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