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 보르도 그랑 크뤼 1등급 와인으로 와인애호가라면 언젠가 한번 꼭 경험해보길 원하는 ‘5대 샤토’ 중 하나다. 최고급 와인이란 이미지 외에도, 샤토 무통 로칠드는 유명 미술작가의 작품으로 레이블을 만드는 ‘아트 레이블’로 유명하다. 1924년 빈티지의 레이블에 처음 시도했고 1945년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아트 레이블은 매년 어떤 작가가 선정될지, 또 그들이 와인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한 작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샤토 무통 로칠드에서는 와인 양조 후 숙성시기를 거쳐 출시 시기인 2년 뒤에 레이블을 작업하는데, 지난 2017년 11월에 드디어 2015년 빈티지의 레이블이 공개됐다. 그 주인공은 독일을 대표하는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미술품 경매에서 생존 작가 중 작품이 가장 높은 금액에 거래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샤토 무통 로칠드의 만남

샤통 무통 로칠드의 아트 레이블은 작가의 기존 작품을 이용해 레이블을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매년 아티스트를 선정하고 그에게 작업을 새롭게 의뢰해 제작하는 협업이다. 작가들은 포도나무나 와인, 혹은 샤토 무통 로칠드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데, 그것을 주제로 삼을 뿐 특별한 원칙은 없고 와이너리 측에서는 작가 고유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창작하도록 지원한다.

최근 공개된 샤토 무통 로칠드 2015년 레이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

이번에 공개된 리히터의 아트 레이블은 섞일 듯, 섞이지 않은 다양한 컬러의 배합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Flux(유동)’라고 불리는 그의 작업은 플렉시글라스에 에나멜페인트를 뿌리고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둔 뒤 그 위에 다른 유리판을 고정시킨 것. 그는 물감이 움직이며 흐르는 도중에, 색의 조합이 조화롭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완성품의 형태를 작가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의도할 수 없지만 가장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다고 느끼는 순간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매우 우연적이면서도 동시에 계획된 작업이다. 즉, 작가가 통제한 상황 속에서 재료가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허용하는 방식으로 완성한 ‘과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컬러의 생생한 움직임은 마치 조화로운 블렌딩으로 만들어진, 밸런스가 뛰어난 와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Gerhard Richter (c) Konstanze Ell _ Studio Richter

리히터는 1960년대부터 책이나 신문, 잡지에서 모은 사진이나 직접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사진회화(Photo Painting)’라 불리는 그의 작업은, 있는 그대로를 담은 사진의 리얼리즘에 붓질을 더해 완성한 자신만의 회화 양식이다. 선명한 사진과 달리 경계를 흐릿하게 표현한 그의 사진회화 작품은 해상도가 떨어지거나 포커스가 맞지 않은 이미지처럼 아련한 느낌이다.

Gerhard Richter, <Two Women>(1967) Catalogue Raisonné: 147-1, Oil on canvas

사진회화 이후 그는 추상화로 나아갔다. 캔버스에 층층이 쌓인 다양한 색채가 뒤섞여 만들어낸 이미지는 독특한 조화를 이루며,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공간감, 심연으로 빠져드는 듯한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형태를 규정할 수 없는 자유로운 색의 조합으로 마치 자연의 흔적과 울림을 전하는 듯하다.

Gerhard Richter, <Net>(2006) Catalogue Raisonné: 895-9, Oil on canvas
리히터의 추상화 작업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영상. 쾰른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에서 촬영했다

그런데 리히터 자신은 작품을 특정 양식을 분류하고 규정하길 원치 않는다. 특정한 체계나 경향을 따르지 않는다고 강조해온 그는 규제도, 한계도, 뚜렷한 확실성도 추구하지 않는다. 회화 장르에서 그처럼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펼친 작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예술 언어를 활용해 작품세계를 표현한다. 수많은 예술 언어를 가진 그가 이번에는 샤토 무통 로칠드의 레이블을 통해 와인이라는 새로운 예술과 만난 셈이다.

Gerhard Richter, <Ella>(2007) Catalogue Raisonné: 903-1, Oil on canvas
현재 퀸즐랜드 아트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

 

뛰어난 화가들이 완성한 또 하나의 예술

그동안 샤토 무통 로칠드가 작품을 의뢰한 작가 중엔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이 많다. 살바도르 달리(1958년), 후안 미로(1969년), 마르크 샤갈(1970년), 파블로 피카소(1973년), 앤디 워홀(1975년), 키스 해링(1988년), 프랜시스 베이컨(1990년), 제프 쿤스(2010년), 데이비드 호크니(2014년)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참여했다. 특히 2013년 빈티지는 한국 작가 중 최초로 이우환 화백이 작업해 국내에서도 크게 화제가 됐다. 그가 작업한 레이블은 2015년에 공개됐는데, 그는 와인이 무르익듯 오른쪽으로 갈수록 깊어지는 고귀한 자줏빛 컬러로 ‘점’을 표현했다.

이우환 화백이 그린 샤토 무통 로칠드 2013년 빈티지 레이블

평소 와인애호가로도 잘 알려진 이우환 화백은 당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재료에 인간의 지혜를 더해 혼을 울리는 차원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와인과 예술은 서로 다를 것 없는, 모두 위대한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샤토 무통 로칠드의 아트 레이블은 그의 말처럼 두 예술 분야가 만나 탄생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제는 와이너리의 상징이자 수십 년간 이어온 위대한 명화 컬렉션으로도 자리 잡았다.

역대 아트 레이블을 볼 수 있는 샤토 무통 로칠드 홈페이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세계를 볼 수 있는 작가 홈페이지

 

 

Writer

잡지사 <노블레스>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과 문화예술,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 <마음이 어렵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여행서 <Tripful 런던>, <셀렉트 in 런던>이 있다.
안미영 네이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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