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앤디 워홀은 이미 명성과 재력을 겸비한 뉴욕의 예술가였다. 그는 1962년 맨해튼 47번가에 ‘더팩토리(The Factory)’라는 이름으로 스튜디오를 열고,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매일 파티를 열고 예술을 논하였다. 그에게는 미지의 영역인 영화와 음악을 그의 팝아트 예술에 접목하고자 했던 것이다.

▲ 앤디 워홀(중앙)과 ‘더팩토리’ 일원들

워홀은 어느 날 뉴욕의 Café Bizarre에서 연주하던 밴드의 리드 싱어에게 마음을 뺏긴다. 밴드 이름은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리드 싱어는 루 리드(Lou Reed)였다. 36세인 워홀은 23세의 루 리드에게서 젊은 날의 자신을 보았고, 그들을 더팩토리로 끌어 들이기 위해 공을 들였다. 밴드는 더팩토리의 넓은 공간과 각종 미디어 장비, 무료로 제공되는 음식과 음료들, 매일 벌어지는 파티와 환각제에 매료되었다.

당시 워홀은 더팩토리에 초대한 예술가들에게 스크린 테스트를 받게 했는데, 리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경음악은 리드의 창작곡인 ‘I Am Not a Young Man Anymore’이다.

Lou Reed Screen Test
▲ 빌 에반스 트리오 앨범 <Moonbeams> 커버를 장식한 니코

워홀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하고 새 앨범 제작에 착수했다. 리드의 음울한 보컬이 마음에 들지 않은 워홀은 새 여성 보컬을 합류시키자고 설득했다. ‘니코(Nico)’란 예명의 독일 출신 <보그(Vogue)> 모델이었다. 니코는 이미 유럽과 뉴욕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알랭 들롱, 밥 딜런, 브라이언 존스(롤링 스톤즈) 등과 어울리는 유명인이었다. 빌 에반스의 팬이라면, 그의 앨범 <Moonbeams> 커버 모델로 나온 그를 기억할 지도 모르겠다. 아래는 당시 워홀이 직접 찍은 니코의 테스트 영상이다. 

Nico's Screen Test

그러나 레코딩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니코의 보컬은 자주 음을 놓쳤고 분장실에서 준비하느라 꾸물거려 리드와 자주 고성이 오갔다. 워홀의 중재에 의해 리드는 니코의 보컬 스타일에 맞는 노래를 따로 만들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음반이 1967년의 <Velvet Underground and Nico>다. 니코는 전체 11곡 중 3곡에서만 보컬을 했는데, 그중 워홀의 더팩토리 스타인 여배우 에디 세즈윅(Edie Sedgwick)을 그린 ‘팜므 파탈(Femme Fatal)’을 들어보자.

Velvet Underground 'Femme Fatal'

 

 <Velvet Underground and Nico> 앨범 커버. 앤디 워홀이 도안한 바나나 아트웍은 전설이 되었다.

이 음반은 상업적 실패로 막을 내렸다. 워홀이 직접 도안한 바나나 문양의 앨범 재킷과 톱모델 니코의 보컬 참여에도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고, 마약, 매춘,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가사 내용 때문에 라디오와 음반가게들이 거부하기도 했다. 발매 후 10여년이 지나서야 평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지의 ‘올타임 베스트 앨범’ 13위에 오른다. 영국의 음악가 브라이언 이노(Brian Peter George Eno)는 이 앨범에 대해 “앨범은 3만 장 판매에 그쳤지만, 3만 장을 산 사람들은 모두 밴드의 리더가 되었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수록곡 중 ‘Venus in Furs’는 발매 당시에는 가사의 음란성으로 논란이 되었으나, 지금까지도 영화, 광고에서 자주 리바이벌하는 명곡이 되었다. 

Velvet Underground 'Venus in Furs'

그러나 그들의 협력은 오래 가지 않았다. 리드는 자신이 간염으로 6개월 여 활동하지 못하는 동안 니코와 워홀이 밴드를 좌지우지하자 탈퇴를 선언하였고, 남은 밴드 멤버는 새로운 매니저를 찾아 나선다. 니코는 워홀의 지원 하에 솔로로 나서 성공적인 싱어송라이터로 이름을 날리게 되고, 워홀은 리드와의 결별 직후 더팩토리의 직원으로부터 총을 맞는 불행을 치른다. 죽음 직전에 간신히 살아난 워홀은, 다시는 흥청망청 방종에 가깝게 자유롭던 더팩토리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루 리드는 그후 솔로로 나서 시라큐스대학 문학과 장학생답게 자기만의 서사를 담은 명곡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 중에서도 ‘Walk on the Wild Side’, ‘Perfect Day’는 뉴욕 언더그라운드록을 대표하는 명곡이 되었고, 일반 팬보다 평론가와 동료 가수들이 더 칭송하는 이례적인 곡으로 남았다.

Lou Reed 'Walk on the Wild Side'

 

Lou Reed 'Perfect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