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낵 컬처(Snack Culture)의 대두로 짧은 영상들이 유행이다. 온라인에서는 짧은 러닝타임에 함축적인 스토리를 담은 콘텐츠들이 쏟아진다. 그중에서도 많은 방송, 광고 업계의 레퍼런스로 이용되며 무수한 패러디를 부른 초압축 드라마 ‘72초’는 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유명 배우나 제작진 없이 2015년, 다섯 명의 적은 인력으로 시작한 콘텐츠 그룹 ‘72초’는 '바나나 액츄얼리', '오구실', '두여자' 등 어느덧 10개가 넘는 시즌물을 만들어내며 두터운 팬층을 쌓았다.

‘72초 시즌 1’ <EP6. 나는 오늘 식당에 갔다> 편

무엇보다 ‘72초’의 창립멤버 중 한 명으로 연기와 연출, 기획을 동시에 해낸 도루묵(Doroomuk)은 무척이나 신선하고도 익숙한 인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도루묵은 '72초 시즌 1, 2, 3', '두여자 시즌 1’을 연출했고 ‘72초’와 ‘오구실’에서 주, 조연으로 등장하며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쳤다. 많은 이들이 그를 연출자보다도 연기자로 많이 알고 있지만, 도루묵은 처음 영상을 만들 때부터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하고 연기를 했고, 일련의 과정들이 오늘날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무엇보다 음악을 기반으로 한 영상에 속사포 같은 내레이션과 빠른 화면 편집을 더한 도루묵의 미니 드라마는 짧은 에피소드에 서스펜스, 반전, 감동, 로맨스를 모두 담아내며 보는 이들에게 신선한 재미를 안겼다.

'두여자 시즌 1' <EP1. 표예진 최승윤의 환불 원정> 편. 두 여자가 먹고 놀고 사는 이야기를 빠른 호흡과 음악적인 진행으로 전개한 초압축 비주얼 드라마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익숙한 것이 다르게 보일 때의 낯섦,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 뒤통수를 맞았을 때의 번쩍함, 세상에 없던 것을 처음 볼 때의 흥미로움, ‘72초’가 선보이는 재미는 언제나 재미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기존에 없던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디렉터 도루묵은 인터넷에 뿌려진 수많은 영상 중 어떤 것을 보고, 어떤 영향을 받으며 작업에 임할까? 그가 평소에 즐겨보고, 듣는 시청각들을 보내왔다.

Doroomuk Says,

“현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 체계는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기존 질서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구태의연한 전통을 거부하며, 새롭게 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노력들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평소에 좋아하는 것들은 이러한 익숙함으로부터 떨어지려 하는 것들, 예를 들면, 천명관 작가의 소설 <고래>나, 리미니 프로토콜의 공연들, 고다르의 영화들과 형돈이와 대준이의 작업들입니다. 그중에서 ‘음악을 비디오로 구현하는 작업물’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유머러스한 시도 몇 개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1. The Chemical Brothers 'Star Guitar' MV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의 ‘Star Guitar’는 데이비드 보위가 1972년 발표한 싱글 <Starman>의 맨 앞 기타 두 마디를 샘플링하여 만든 곡입니다(그래서 곡 이름을 ‘Star Guitar’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이 연출한 이 뮤직비디오는 음악과 영상이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완벽히 조화하는데, 그야말로 장면이 들리는 듯하고 소리가 보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기차여행을 할 때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 노래를 들으면 내적 댄스가 자동 유발됩니다.

 

2. Pogo 'Wishery'

Pogo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전자음악 뮤지션 겸 리믹스 아티스트 Christopher Nicholas "Nick" Bertke의 작업물입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뉴스 등의 사운드/영상 샘플들을 활용하여 유쾌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영상이 음악이 되고, 음악이 다시 영상이 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정도 퀄리티가 되면 디즈니에서 저작권 침해 소송 대신 사용 장려(?)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Powerful Electronic Live Performance

Monday Studio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래픽디자이너 겸 DJ의 작업물입니다. 디시인사이드의 일렉트로니카 갤러리에 KBS 스포츠 오프닝 음악을 리믹스해서 DJ 티에스토(Tiesto)의 공연 영상 편집본과 결합시킨 절묘한 콜라보입니다. 노래를 듣자마자 트랙을 막 달리고 싶다거나, 시원하게 중 거리 슛을 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감상일지도 모릅니다. 영상 제목에 ‘kyrgyzstan bouncing syndrome’이라고 쓰여 있는데 줄이면 KBS가 됩니다.

 

4. AB/CD/CD ‘On Hold’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비디오 디렉터 듀오 AB/CD/CD의 작업입니다. 뮤직비디오, 패션 필름, 광고 등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레퍼런스 삼고 싶을 법한 스타일리시한 영상작업들을 하면서 각종 어워드를 휩쓸고 있습니다. 영상과 음악을 구조적으로 동일시하며 앞뒤가 따로 없는,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되는 형태의 위트 있는 결과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디렉터 도루묵은?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공연예술 이론을 전공하고 시청각 예술창작집단 ‘IN THE B’에서 디렉터로 활동하면서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다원예술연극 등 다양한 작업을 4년간 했고 돈은 거의 못 벌었다. 그러다가 인더비의 구성원들이 재미 삼아 만든 ‘72초’가 인기를 얻으면서 현재는 주식회사 칠십이초에서 ‘72초’, ‘두 여자’ 및 각종 광고들을 만들고 배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영상을 따로 배운 적이 없어서 ‘족보 없는’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며, 도루묵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이름이 알려지는 게 부끄러워서’일 정도로 꽤 소심한 성격이다.

도루묵 인스타그램

 

(메인이미지 출처=’72초 시즌 2’ <EP3. 그녀의 생일이 다가온다> 편 캡쳐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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