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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는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여느 재즈 피아니스트와는 달리, 고개를 푹 숙이고 사색하듯 다음 건반을 이어가는 그의 피아노 연주는, 자신의 불행한 인생사를 이야기하듯 구슬프고 애잔하게 들린다. 깔끔한 옷차림, 진지한 표정이나 반듯하게 넘겨 올린 헤어 스타일, 무언가에 집중하는 연주 자세,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이 담긴 그의 영상을 보면, 피아노 소리와 무척 닮은 그의 생생한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빌 에반스의 영상물은 1965년에서 1979년 사이에 모두 12편이 제작되어 비디오와 DVD로 발매되었고 대부분 유튜브에서 전편을 감상할 수 있다. 그중 몇 편을 꼽아 보았다.

 

<Jazz 625: The Bill Evans Trio>(1965)

영국의 BBC 방송의 재즈 프로그램 <Jazz 625>는, 1965년 3월 19일에 빌 에반스 트리오의 연주를 두 번에 걸쳐 녹화했다. 영국의 재즈 연주자 험프리 라이텔톤(Humphrey Lyttelton)의 사회로 60분간 13곡의 주옥같은 레퍼토리를 이어간다. 피아노를 응시하며 관객을 간간이 돌아보는 그의 태도는,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타는 그의 성격을 어느정도 짐작케 한다. 에반스의 최고 전성기에 녹화된 이 영상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국회의사당에 영구 소장되었으며,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 에반스의 연주 영상은 대부분 이를 곡별로 편집한 것이다.

 

<Universal Mind of Bill Evans>(1966)

“사람들은 보편적인 음악적 생각(Universal Musical Mind)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유명한 어록으로 시작되는, 에반스의 가장 유명한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약 45분 분량의 영상 대부분은 영국의 라디오 진행자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스티브 앨런(Steve Allen)과 음악 교사인 친형 해리 에반스(Harry Evans)와의 대담으로, 자신의 창의적 프로세스나 피아노 연주 등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밝힌다. 에반스와는 각별한 관계인 친형 해리는 후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동생의 죽음을 앞당기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Bill Evans Trio in Helsinki>(1970)

핀란드의 저명한 작곡가 겸 지휘자인 일카 쿠시스토(Ilka Kuussisto)의 헬싱키 자택에 초대되어 거실에서 그의 가족과 친지들 앞에서 트리오 연주를 하는 독특한 영상을 핀란드 방송사에서 제작했다. 1968년 에디 고메즈(Eddie Gómez, 베이스)와 마티 모렐(Marty Morell, 드럼) 로 재편성된 빌 에반스 트리오는 30분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스칸디나비아 풍경에 꼭 어울리는 ‘Emily, ‘Alfie’, ‘Nardis’ 세 곡을 연주하고, 간간이 응접실에 모여 앉아 참석자의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담을 나눈다. 핀란드의 클래식 거장은 후일 국립오페라 단장이 되며, 두 아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된다.

 

<Bill Evans at Molde Jazz Festival>(1980)

일년 전 친형의 죽음에 의한 슬픔으로 인해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그는 8월 노르웨이의 몰데 재즈 페스티벌에 참여하여 생애 마지막 연주와 인터뷰 영상을 남겼다. 오랜 기간 그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한 에디 고메즈를 젊은 마크 존슨(Marc Johnson)이 대체했다. 이 페스티벌을 포함한 유럽 연주 여행에서 돌아와 포트리의 자택에서 휴식하던 그는, 며칠을 복통으로 고생하다 9월 15일 뉴욕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안타깝게도 그 날 오후에 사망했다. 그의 사인은 위궤양, 간경변, 폐렴, 만성 간염의 복합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몰데에서의 영상은 그가 사망하기 불과 5주 전의 귀중한 영상이며, 이전의 깔끔하고 지적인 이미지와는 많이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메인 이미지  Via tapthep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