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년 전쯤 슬릭(SLEEQ)을 이렇게 소개한 적 있다. ‘프리티’나 ‘언프리티’를 굳이 언급하지도 않고, ‘여성’이기 때문에 얻어지는 편견 혹은 특혜도 모른 척 실력이란 날을 가는 숨은 래퍼라고. 다시 말하면, 랩 잘하는 뮤지션을 언급할 때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프레임은 필요 없다는 얘기다. 슬릭이 굳이 여성 래퍼임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남성’을 기본값으로 인식하는 힙합 신에서 여성이라는 제한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는 지금, 슬릭을 간단명료하게 소개하자면, 단연코 개성과 실력을 갖춘 래퍼라 해도 충분하다.

슬릭 ‘Energy / Python’ MV (2015). 슬릭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직접 프로듀스한 첫 번째 테마 ‘Energy’와 비스메이저(Vismajor)의 버기(Buggy)가 프로듀스한 두 번째 테마 ‘Python’이 연결되어 하나의 트랙을 이루는 곡

2013년 정식으로 데뷔한 슬릭은 래퍼 제리케이(Jerry.k)가 이끄는 데이즈 얼라이브 뮤직에 합류한 후 첫 번째 싱글 ‘Rap Tight’을 발표하며 힙합 신의 주목을 모으기 시작했다. 슬릭은 곡 제목처럼 날카롭고 타이트한 랩을 내뱉으며 여전히 존재했던 ‘여성 래퍼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라는 말을 가뿐히 비껴갔다. 그렇게 슬릭은 일관성을 유지했다. 꾸준히 타이트한 랩, 직관적이면서도 센스 있는 노랫말을 들려주었다. 결국 슬릭은 자신의 실력과 개성으로써 어떠한 편견에 갇히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그는 개인으로부터 나아가 모든 여성에게 씌워진 성차별적 편견을 깨기 위해 ‘페미니스트’ 래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한민국 행정자치부가 내놓은 '출산지도'에 분노하는 여성들을 대변하여 ‘내꺼야’라는 노래를 부르고, 페미니스트 캠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최근에는 <Ma Girls>라는 싱글 앨범을 내놓으며 더 크게 페미니즘의 구호를 외쳤다. 그렇게 소신 있는 음악으로, 행동으로 많은 이에게 용기를 준 래퍼, 슬릭. 이제 그에게 용기와 영감을 준 것들을 살펴볼 차례다.

 

Sleeq say,

“나에게 시각적 영감은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들을 압도한다.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임에도 그렇다. 세상도 이렇게 돌아가는 것 같다. 다른 어떤 플랫폼보다도 거대한 유튜브는 시각 정보로 접할 수 있으면 더 많은 사람에게 소비된다. 한편, 감각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당연히 시각과 청각이 가장 끈끈하다. 눈으로 받아들인 것을 소리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작고 반짝이는 기쁨이 나에게 주는 어떤 자극들을 당신에게도 소개한다.”

 

1. <Don’t hug me I’m scared> 시리즈

<Don't hug me I'm scared 6>

영국의 베키 슬론(Becky Sloan)과 조지프 펠링(Joseph Pelling)이 유튜브에 연재 중인 초현실적, 호러 단편 뮤지컬 필름이다. 장르가 그렇다고 소개되어 있긴 하지만 보면서 무서웠던 적은 없다. 나오는 노래와 가사에 쓰이는 운율이 단순하면서 리듬감을 잘 살려 좋다. 정보를 찾아보면 나름의 심오한 의미를 담은 장면이 많고 굳이 그런 것을 알고 보지 않아도 재미있다. 내용이 긴밀히 이어지는 시리즈물에 집중하기 어려워 잘 못 보는 성격인데 오히려 한 편의 이야기만 떼어놓고 보아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좋아할 것 같다.

 

2. 단편영화 <Jordy in Transitland>

네덜란드 감독 빌렘 티머스(Willem Timmers)가 2016년에 만든 이 단편영화는 2017년 퀴어영화제 해외단편섹션에서 처음 접했고, 나도 모르게 박수가 나왔다. 대략적인 내용은, 육체적인 변화를 앞둔 조디(Jordy)가 자신의 좁은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금해하는 것이다. 내레이션의 내용을 이해하면 더 날카롭고 감동적으로 볼 수 있지만 색감과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영화다. 의미를 앞세운 영상 콘텐츠들의 미감에 대해 생각하고 싶을 때 해외 단편 영화들을 찾아보곤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3. Grand Beatbox SHOWCASE Battle 2017 FINAL - HISS vs NaPoM

어렸을 때 비트박스에 관심을 두다가 한동안 모르는 영역으로 두고 살았는데, 내가 알던 비트박스의 세계보다 훨씬 깊고 다양한 사람들이 멋진 활동을 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HISS의 팬이기도 하고 그가 사람들에게 호응을 이끌어내는 방식에 있어서 아주 촘촘히 짜인 믹스셋을 듣는 것 같아 쾌감이 남다르다. 연령주의적 발언일 수도 있지만, 나는 어린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특출한 재능을 뽐내는 순간을 사랑한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 안에서 자란 사람이 그런 순간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Ta-Ku & Wafia ‘Meet in the Middle’(COLORS VER.)

“음악은 가장 접근하기 쉬운 예술 형식입니다. 음악은 사람, 문화, 생각, 감정 등을 하나로 묶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촉매 작용을 합니다. 우리는 아티스트에게 현대 플랫폼에서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COLORS를 만들었습니다.”
(A COLORS SHOW 홈페이지 소개글 번역)

베를린의 콘텐츠 채널 <A COLORS SHOW>는 콘텐츠 자체로 뮤지션들에게 엄청난 시각적 서포트를 제공한다. 동시에 노래를 듣는 사람에게도 깔끔하고 거슬릴 것 없는 시각적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감각을 연결해 습득하고 표현하는 나에게 이러한 시각 콘텐츠는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적 모멘트’이다. 최근에 타쿠(Ta-Ku)에 또다시 빠져버려서 이 영상을 소개하지만 시리즈의 모든 영상을 추천한다. 비슷한 콘셉트에 아티스트만 바뀌는 것 같아도 다들 고유한 멋을 녹여내고 있다.

 

5. 보컬로이드 댄스 플래시몹 ‘MEGU MEGU’

이 영상에 대한 정보는 잘 모른다. 아주 우연히 새벽에 접한 영상이고, 보는 내내 울었다. 조금 찾아보니 ‘보컬로이드’라는 장르인 것 같고,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 여성혐오적 콘텐츠일 수도, 역사왜곡적 콘텐츠일 수도 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그리고 만약 몰라도 이 장르와 영상에 관련해서 더 알아보지는 않을 것 같지만. 아직도 내가 왜 울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거의 반평생을 누군가의 ‘덕후’로 살아온 내 자아의 깊은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았다. 내가 하는 표현들은 거의 모두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산물의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 그런 점이 맞닿아 있던 것 같다.

 

래퍼 슬릭은?

2011년 언더그라운드 크루 ‘위메익 히스토리(We Make History Records)’로 활동하며 두 개의 믹스테이프를 발표하고, 2013년 싱글앨범 <Lightless>을 통해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후 제리케이가 이끄는 레이블 ‘데이즈 얼라이브 뮤직(daze alive music)’에 합류, 싱글앨범 <Rap Tight>을 발매하며 더욱 주목을 받았다. 2016년 정규앨범 <COLOSSUS> 발매, 2017년 4월 <온스테이지>에 출연하여 힙합 뮤지션으로서 개성과 실력을 인정받았다.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알리며 여성의 권리와 기회를 동등하게 주장하는 활동에 참여한다.

슬릭 트위터 @squarksle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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