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의 미국 사회는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베트남 전쟁과 케네디 대통령 암살, 그리고 흑인 인권운동의 리더 맬컴 엑스(Malcolm X)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연이어 암살되었고, 흑백 갈등의 도화선이 된 폭력과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그 역사의 현장에 니나 시몬(Nina Simone, 1933~2003)이 있었다. 그의 음악은 정치적 메시지로 가득했고 직설적 화법의 가사는 바로 시위 현장의 구호가 되었다. 그의 저항 음악의 효시이자 가장 영향력이 컸던 ‘Mississippi Goddam’(1964)은 미시시피, 앨라배마 등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한 흑인 살해사건을 비난한 곡이다. 뉴스를 보고 분노에 차 1시간 만에 작사 작곡을 끝냈다고 한다.

니나 시몬은 후일 ‘Mississippi Goddam’이 가수로서의 길에 장애가 된 곡이라고 토로하였다

가사에 갓뎀(Goddam)이라는 저주의 단어를 붙였다는 건 당시 사회 분위기에 큰 파장을 불렀다. 음반상들은 이 곡이 수록된 음반 판매를 거부하였고, 라디오 방송국들은 음반을 반으로 쪼개서 다시 돌려보냈다. 물론 남부 주에서는 금지곡이 되었다. 노래의 가사는 점진적인 흑인 인권 개선을 거부하고 지금 당장 개혁하자는 강경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천천히 하자는 것은 더 많은 비극을 불러올 뿐이다. 왜 못 보느냐? 왜 느끼지 못하느냐? 정말이지 모르겠어. 그냥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대우해 달라는 거야.

그의 음악은 종종 재즈로 분류되지만, 클래식, 포크, 재즈, 블루스, 가스펠, R&B의 요소를 버무린 대중음악에 가까웠다. 그는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 불리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미국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저항 운동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기억된다. 이로 인해 가수로서의 경력은 오히려 쇠락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삶도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격정적 삶을 몇 개의 키워드로 알아보자.

 

니나 시몬으로 변신한 클래식 피아니스트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의 열성적 후원으로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다. 줄리아드 음대를 다니던 중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에 지원하였으나 떨어진다. 가족들이 이미 필라델피아로 이사 온 터라 낙방 소식은 큰 충격을 주었고 인종차별이 은연중 작용한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커티스음악원의 블라디미르 소콜로프(Vladimir Sokoloff) 교수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레슨비를 벌기 위해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시작했다. 대중가요를 ‘악마의 음악’이라고 경멸하던 부모에게는 한동안 이 사실을 숨길 수 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니나 시몬이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 클래식을 계속하기 위해 대중음악을 일시적으로 한다는 생각은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50여 년이 지난 후 그가 사망하기 이틀 전, 커티스음악원은 그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빌보드 20위에 오른 유일한 곡 ‘I Love You Porgy’. 40여 장의 음반을 발매했으나 그 명성에 비해 차트 상위권에 오른 곡은 많지 않다

 

강경한 정치적 메시지의 사회운동가

그의 사회운동가 기질은 12세 때부터 드러났다. 첫 피아노 공연 때 관객석 맨 앞에 자리를 잡았던 부모는 백인들이 입장하자 맨 뒤편으로 쫓겨났다. 그는 부모가 다시 맨 앞자리로 돌아올 것을 요구하며 공연을 시작하지 않았다. 불합리한 인종 차별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1964년 네덜란드 계열 음반사인 필립스로 이적하면서 이전 음반사의 만류나 통제에서 벗어나 마음껏 정치적 메시지로 가득 찬 음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인권 집회나 모임에 나가서 노래를 하거나 연설하는 일도 잦아졌다. 그는 이웃에 살던 맬컴 엑스 가족과 친해졌으며, 무장 투쟁을 통해 흑인의 자치주를 만들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하며 사회적인 논란의 중심에 섰다.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추모곡 ‘Why(The King of Love Is Dead)’

 

불같은 성격과 심각한 조울증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과격한 행동으로 분출하는 조울증 환자였다. 분노의 표출 대상이던 정치적 이슈가 완화된 이후에는 더욱 공격적인 양상을 띠었다. 1985년에는 음반사 간부와 로열티 분쟁을 벌이다가 그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죽이려고 총을 쏘았으나 빗나갔다”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1995년에는 이웃집 애의 웃음소리가 커서 집중할 수 없다고 허공에 공기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한때 친구였던 포크 가수 제니스 이안(Janis Ian)의 자서전에도 여러 일화가 등장한다. 가령, 신고 다녔던 샌들을 매장으로 가져가 환불해 달라며 점원에게 총을 겨눴다는 것이다. 가족들의 권유로 30대부터 명상을 하면서 통제를 하였지만, 중년이 되어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면서 증세는 더욱 심각해졌다.

폭스바겐 광고에 삽입되면서 뒤늦게 인기를 누린 곡 ‘Feeling Good’(1965)

 

해외를 전전한 유랑 생활

과격한 정치 성향으로 인해 갈수록 음악업계의 기피 대상이 되었고, 게다가 폭력적인 남편에 대한 두려움과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일상생활은 그를 짓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가족 친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홀로 미국을 떠나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로 떠난다. 항상 자유로운 삶을 원했던 그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미국을 ‘United Snake’라 경멸하며, 미국에서 해방된 노예가 만든 ‘자유의 나라’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동반자 없이 홀로 전 세계를 여행하였고, 돈이 떨어지면 클럽과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하였다. 그 유명한 니나 시몬이 하루 3백 달러를 받고 허름한 클럽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날로 생활은 궁핍해졌고 주변 사람들과 멀어져 갔다. 1993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서야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하여 노년을 보냈다. 70세가 되던 2003년 사망 후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재는 아프리카 전역에 고루 뿌려졌다.

‘My Baby Just Cares for Me’는 샤넬 No. 5 광고에 삽입되며 인기곡이 되었다

그의 격정적 삶은 많은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 최근에는 배우 겸 가수로 활동 중인 딸 리사(Lisa Stroud)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What Happened, Miss Simone?>(2015)도 새삼 화제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지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인생을 가감 없이 묘사하여, 2016년 아카데미 최고 다큐멘터리 후보작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넷플릭스에서 한글 자막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