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 긴 시간을 할애하거나 과장된 연기를 보이지 않아도, 독보적인 캐릭터와 아우라를 뽐내며 관객의 영화몰입을 성공으로 이끄는 배우들이 있다. <배트맨 비긴즈>(2005), <다크 나이트>(2008),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시리즈를 통틀어 일컫는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에 이어 <인셉션>(2010)과 <덩케르크>(2017)까지 출연하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총애를 받은 킬리언 머피(Cillian Murphy)가 바로 그런 배우다. 놀란 사단 약방의 감초로 늘 길지 않은 장면을 장식하지만 매번 독특하고 인상적인 캐릭터로 영화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에게는, 다른 배우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영민한 불안이 스며있다.

<28일 후> 스틸컷

킬리언의 얼굴을 대중에게 처음 알린 작품은 <28일 후>(2002)다.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사랑받아 현대 좀비 영화의 모범이 된 이 영화에서 주인공 '짐' 역을 맡았다. 그는 줄거리 도입부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텅 빈 런던을 당황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배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사이코패스 정신과 전문의

<배트맨 비긴즈> 스틸컷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린 것은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서다. 브루스 웨인을 뽑는 오디션에 지원했던 킬리언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의해 악당 '스케어크로우'로 발탁된다. 겉으로는 잘생기고 이지적인 정신과 전문의 조나단 크레인 박사이지만 이면에는 제 몸 사리지 않고 악한 행적을 일삼는 사이코패스 역할이다. 게다가 주인공 배트맨에게 속절없이 당하거나 비열한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전편에 개근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불길함과 짠함, 반가움 등을 혼란스럽게 교차하게 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인셉션>
유약한 재벌 2세

<인셉션> 스틸컷

이어서 <인셉션>에도 출연한 킬리언은, 타인의 꿈에 침투해 그의 심층의식을 조종하는 주인공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일행의 표적 '로버트 피셔'가 된다. 세계 에너지시장을 독식하고 좌지우지하는 기업의 후계자로서 부유하고 지적인 엘리트 이미지를 풍기지만 동시에 결국 주인공의 계획대로 휘둘리고 당하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무능한 조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킬리언이 연기한 로버트 피셔에게는 일말의 가벼움이나 우스꽝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줄거리 상 유약하기만 한 인물임에도 반듯함과 진지함이 공존했다.

 

엘리트 이미지

영화 밖 킬리언의 아버지는 정부 교육청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프랑스어 교사였으며 자신은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로서의 안정적인 삶을 목표로 삼았을 만큼, 젊은 시절 그의 인생은 배우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는 연극에 매료되고 우연히 출연한 연극에서 연기 호평을 받으며 진로를 변경했고, 오랜 역사와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더블린 드루이드 극단에서 활약하며 연기자로서 자리를 잡는다. 번듯했던 지난 기억과 착실히 연극무대를 누리며 성장해간 그의 연기에 대한 자긍심이, 아무래도 의사와 재벌 2세 역할을 맡고 다른 영화에서 물리학자 역할을 맡는 등의 이지적인 엘리트 이미지를 주었을 것이다.

 

불안의 근원

차가운 분위기의 인상과 내향적 성격은 그가 맡는 역할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심어준다. 우리 표현 속 벽안(碧眼)이라는 말이 누구보다도 어울리는 밝고도 강렬한 크리스탈 빛의 눈동자와 때로는 짙고 음흉하게 때로는 맑고 순진하게 오르내리는 두꺼운 눈꺼풀이 킬리언 머피만의 신비롭고 아리송한 매력을 배가한다. 이는 실제로 매우 가정적이지만 한편으로 예민한 채식주의자(<피키 블라인더스>를 찍으며 채식주의를 중단했다)에 까다로운 완벽주의자이기도 한 그의 실제 성격과 맞물려, 캐릭터가 영화에 줄 수 있는 최선의 극적 긴장감을 유발한다.

 

<덩케르크>
떨고 있는 병사

<덩케르크> 스틸컷

킬리언이 그려내는 영민하고 불안한 이미지, 바름과 혼란이 공존하는 오묘한 매력은 놀란 감독의 신작 <덩케르크>에서도 이어진다. 적군에 대한 묘사와 아군의 구구절절한 사연 없이 개인의 생존만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한 이 영화에서, 킬리언이 외치는 “돌아갈 수 없다”는 간절한 외침은 결코 비굴하게만 비치지 않는다. ‘떨고 있는 병사(Shivering Soldier)’ 역으로서 이름조차 부여되지 않은 킬리언의 역할, 곧 남을 곤경에 빠뜨리면서까지 살아남으려 했다가도 이내 이성을 부여잡으려는 이 캐릭터가 어쩌면 영화의 주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그려내는 우리네 군상이 아닐까 싶다. 킬리언의 영민한 불안은 어쩌면 놀란 감독 한 사람만을 위한 페르소나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페르소나일지도 모른다.

<덩케르크>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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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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