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탄 게츠(Stan Getz, 1927~1991)는 아마도 역대 재즈 아티스트 중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스타로 기억된다. 생전 5개의 그래미를 수상했고, 출반한 앨범은 백 장을 훌쩍 넘어선다. 깔끔한 외모와 간결하고 감미로운 멜로디의 발라드 연주로 팝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고등학생이었던 15세 때부터 잭 티어가든 밴드에서 아트 페퍼(Art Pepper)의 대체 연주자로 재즈 신에 등장했고, 줄리아드 음대 장학생 권유를 뿌리치고 직업적인 재즈 연주자로 나섰다. 레스터 영에게 레슨을 받으며 그를 잇는 쿨 재즈(Cool Jazz) 스타일의 테너 색소폰 연주로, 최고의 멜로디 연주라는 찬사가 따라 다녔다.

그의 레퍼토리 중 가장 유명한 'Autumn Leaves'

그의 연주는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고, 한 소절만 들어도 그의 연주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정체성이 뚜렷하다. 로맨틱한 발라드에도, 속주가 필요한 하드밥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60년대 초반 그와 같이 연주했던 비브라폰 연주자 게리 버튼(Gary Burton)은, “스탄이 가르쳐준 것 중 하나가 간결하게 연주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간결하게 연주했고, 나는 온갖 복잡한 것들을 연주하려던 때였다. 그러나 청중들은 그의 연주에 더 매료되었고, 나는 그의 음악적인 내공을 배우는 데 3년이 걸렸다.”라고 회고한다. 스탄 게츠는 주트 심스(Zoot Sims), 알 콘(Al Cohn), 서지 샬로프(Serge Chaloff)와 함께, 우디 허먼 빅 밴드(Woody Herman Big Band)의 4형제로 불리며 40년대 후반 재즈 스타로 떠올랐다.

40년대 우디 허먼 빅 밴드의 히트곡 ‘Early Autumn’은 게츠의 명연주로 유명하다

게츠는 재즈 신에 나설 무렵인 16세에 마약 상용자가 되었고, 이후 술과 마약은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젊은 시절 모르핀을 구하려고 약국에 침입했다가 절도죄로 징역을 살기도 했지만, 다행히 음악이나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법적인 문제 등를 피하기 위해 1958년 유럽으로 건너가 3년간 덴마크에서 거주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재즈계는 크게 진화한 뒤였다. 1959년 수많은 명반 출시와 함께, 동부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서부는 데이브 브루벡이 우뚝 서 있었다. 철치부심 다시 연습을 시작했고, 국무부의 주선으로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Charlie Byrd)와 함께 브라질을 다녀온 후 재즈와 보사노바를 접목한 두 장의 명반을 냈다. 여기에 수록된 ‘Desafinado’와 ‘Girl from Ipanema’는 세계적인 명곡이 되었다.

보사노바의 세계화에 기여한 게츠의 두 장의 명반
보사노바의 선구자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의 보사노바 곡을 메들리로 연주하는 게츠

그는 1981년 25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온 두번째 부인 모니카와의 이혼소송을 제기한다. 이혼 사유는, 그녀가 알콜 중독 치료제 안타부스(Antabuse)를 음식에 몰래 넣었다는 것이다. 재판은 6년을 끌었고 1987년에 가서야 법원의 허가가 떨어져 공식적으로 이혼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부인이 다시 상급법원에 이혼판결 철회 청구서를 제출하였고, 상급법원은 가정법원이 아니라 비용이 많이 드는 1심 재판으로 내려보냈다. 세기의 이혼 재판은 10여 년을 끌면서, 부인은 7명의 변호사를, 남편은 3명의 변호사를 채용했다. 하지만 결과는 혹독했다. 게츠는 1991년 간암으로 사망하였고, 변호사 비용은 1백 5십만 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그들이 결혼 10년 차에 구입한, 22개 방이 딸린, 작곡가 어빙 벌린(Irving Berlin)의 미망인이 살던 쉐도우브룩 저택은 변호사들 손에 넘어간다.

Stan Getz & The Oscar Peterson Trio 'I Want To Be Happy'(1957)

게츠는 어릴 때부터 전과목 A의 우등생이었다. 술과 마약을 탐닉했으나 아트 페퍼나 쳇 베이커와는 달리 그의 음악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이는 10년에 걸친 이혼 재판의 주요 이슈 중 하나였다. 부인 모니카는, “나의 헌신적인 내조와 통제가 없었다면, 남편은 찰리 파커처럼 폐인처럼 살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며 아티스트 수입의 절반을 주장한 것이다. 그가 비밥, 쿨, 보사노바에 영원한 족적을 남긴 거장이 된 데에는 자신의 통제력과 부인의 내조가 상당히 작용했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