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를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있나? 나보다 가난하면 약자고, 나보다 돈 많으면 약자가 아닌가? 누군가를 두고 ‘약자’라 명명하는 건, 절차상 편의를 위한 기준, 타인과 나 사이를 재단하는 이분법적 사고, ‘다수’가 아닌 이들을 겨냥한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두고 폴란드 출신 예술가 크지슈토프 보디츠코(Krzysztof Wodiczko)는 “특정 계층만이 사회적 약자가 아닌, 우리 모두가 언제든 예기치 못한 일로 약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보디츠코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약자’라는 감투를 씌우는 대신, 그들의 고통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공공화하는 데 집중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은 이런 보디츠코의 사회고발적인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다.

 

스위스 바젤 쿤스트뮤지엄 전면에 상영된 미등록 이주노동자, 2006 (이미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크지슈토프 보디츠코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폴란드에선 작업에 제약이 있어 캐나다로 건너갔다. 이주 후엔 미국, 멕시코,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갈 곳 잃은 난민, 불법 이민자, 가정 폭력에 노출된 사람, 원자 폭탄 피해자를 만났다. 그 고통의 목소리를 채집하고 영상으로 만들어 공공장소에 전시했다. 벨기에 시청사, 스위스 미술관,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상영된 영상은 사회 문제를 공론화하는 기회로 기능했다.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세상에 알리는 것, 그 고통의 목소리에 확성기를 대고 퍼지게 만드는 것이 보디츠코의 목적이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원폭돔에서 열린 공공 프로젝션

‘히로시마 프로젝션’은 보디츠코가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상 작품이다. 1999년 여름, 히로시마 원폭돔에서 공개했다. 히로시마 주민들이 겪은 전쟁,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 대한 증언을 담았다. 주민들이 말할 때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손과 표정을 담은 장면을 교차 편집해 영상을 완성했다. 집단이 겪은 트라우마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이 영상은 사회 문제를 다수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공공예술로 평가됐다.

 

나의 소원, 2017 (이미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보디츠코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한 ‘나의 소원’도 같은 맥락이다. 보디츠코는 전시를 열기 일 년 전부터 서울을 드나들며 취재했다. 한국 사회를 담은 작품을 기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16년 5월, 작품을 위해 한국에 처음 왔고, 2016년 12월엔 추운 날씨 속 광화문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려 다시 서울을 찾았다. 보디츠코의 한국 취재는 오롯이 작품의 재료가 되었다. 취재를 마친 올 3월엔 ‘나의 소원’ 작업을 시작했다. 김구 선생을 모티프 삼아 동상을 만들었고, 선생의 ‘나의 소원’을 그대로 가져와 제목을 달았다. 동상 위엔 해고노동자, 세월호 희생자, 성 소수자 운동가의 모습을 비추었다. 보디츠코의 ‘나의 소원’은 김구 선생이 열망한 이상적인 사회,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을 투영한 결과물이었다.

한 노숙인이 뉴욕 트럼프 타워 앞에서 노숙자 수레를 시연 중인 모습, 1988 (이미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 전시에선 기념비적 동상, 과거에 공개했던 프로젝션 영상과 함께 여러 오브제도 공개됐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오브제들이다. 뉴욕 노숙자를 위해 만든 ‘노숙자 수레’가 대표적이다. 폐타이어를 태운 열로 몸을 녹이는 노숙자를 본 보디츠코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수레를 디자인했다. 하지만 실제 생산에 목적을 둔 건 아니었다. 노숙자가 길에서 먹고 자고 하는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하려는 의도였다.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이미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보디츠코는 1943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십 번에 걸쳐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문제를 고발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해왔다. 그 예술의 핵심은 타인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창조적인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데 있다. ‘사회화된 아티스트’를 자처한 보디츠코의 예술세계는 10월 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
일시 7월 5일(수)~10월 9일(화)
시간 월 휴관, 토 10:00~21:00, 그 외 10:00~18:00
문의 02-3701-9500
장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홈페이지 www.mmc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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