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 개봉한 영화 <사랑의 행로(Fabulous Baker Boys)>는 호텔 라운지를 전전하는 떠돌이 뮤지션들의 사랑 이야기다. 저예산 영화로, 제프 브리지스 형제와 당시 B급 배우였던 미셸 파이퍼(Michelle Pfeiffer)를 내세운 전형적 멜로물이자 음악영화였고, 흥행 또한 ‘중박’에 그쳤다.

<사랑의 행로> 예고편

하지만 미셸 파이퍼의 연기와 노래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그는 골드글로브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고, 모든 평론가와 매체의 광적인 찬사가 이어졌다. 특히 그랜드 피아노 위에 올라 피아노를 연주하던 제프 브리지스를 유혹하듯 ‘Makin’ Whoopee’를 노래하는 장면에선 <길다>의 리타 헤이워드, <뜨거운 것이 좋아>의 마릴린 몬로와 비교될 만큼 압도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Makin' Whoopee' 노래 장면

당시 20세기폭스 사는 마돈나, 데브라 윙거, 조디 포스터, 브룩 쉴즈 같은 톱스타를 캐스팅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주연급 캐스팅에 목말라 했던 미셸 파이퍼에게 역을 맡겼다. 그는 2개월 동안 하루 10시간의 보컬 트레이닝을 거쳐 모든 노래를 대역 없이 소화했다. 직업 가수가 아님에도 피아노 반주에만 의존하여 매력적인 저음으로 재즈 스탠더드를 소화하는 모습은 지금 봐도 놀랍다.

제프 브리지스의 피아노 연주 장면에는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재즈 피아니스트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의 연주를 더빙했다. 데이브 그루신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나 골든글로브는 아쉽게 놓쳤지만, 대신 그래미 영화음악상 수상이 위안이 됐다.

<사랑의 행로> OST 음반은 빌보드 재즈 차트 3위까지 올랐는데, 그중 최고 인기곡은 역시 미셸 파이퍼가 부른 ‘My Funny Valentine’이다. 늦은 밤에 듣기 좋은 재즈 풍 발라드로 많은 사람들이 당시 유행하던 벨소리나 컬러링 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어딘가 부족한 여성’의 역할을 주로 맡던 미셸 파이퍼는 이 영화를 계기로 톱 클래스 배우로 거듭난다. 비록 그 해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드라이빙 미스데이지>의 제시카 탠디에게 돌아갔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