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시타 기요시, <불꽃(나가오카)>

저녁에 길을 걷다가, 집에서 TV를 보다가 어디선가 펑펑 울려 퍼지는 큰 소리를 듣는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다시 한번, 밤하늘 어딘가 큰 소리와 함께 밝아지는 것을 본다. 불꽃놀이다. 소리 나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화약이 터지는 압도적인 소리보다 더 놀라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우수수 쏟아지는 신비로운 별 무리, 눈앞에서 피어났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불꽃. 초가을 무렵 한강 일대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불꽃놀이(정식명칭 서울세계불꽃축제)도, 새해를 맞이하는 한겨울의 불꽃놀이도 있지만, 스포츠 경기장이나 놀이공원, 대학축제처럼 저녁까지 마음 놓고 야외에서 놀 수 있는 여름 무렵의 불꽃놀이는 더욱 친숙하고도 향수 어린 구석이 있는 풍경이다. 해변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쏘아 올려진 작은 불꽃도 여름의 정경. 뜨겁게 달아오르고 한순간 식어버리는 계절의 인상 또한 작열하는 불꽃의 이미지와 닮았다.

오쿠무라 코이치, <마이코와 불꽃>, 1950년대

특히 일본에서 불꽃놀이(花火, 하나비)는 여름의 풍물이다. 더위가 한창인 7, 8월이 되면 일본 곳곳에서 불꽃놀이가 열린다. 오래된 불꽃축제는 1700년대까지 기원이 올라가기도 한다지만, 불꽃놀이가 정규 행사로 자리 잡아 지금의 모습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부터라고 한다. 이제는 전국에서 인파가 몰려들 정도로 명물이 된 대규모 불꽃놀이도, 지역 축제인 마쓰리 기간이면 저녁 무렵 유카타를 입고 소박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모습도 일본만의 여름 풍경이다.

야마시타 기요시, <나이아가라 불꽃과 구경꾼들>

화가 야마시타 기요시(山下 清, 1922~1971)는 그런 일본의 여름밤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방랑 화가로 유명하다. 일본 전역을 떠돌며 각지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장기간의 여행이 끝나면 자신이 기억한 풍경을 작품으로 제작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각 지역의 특색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화려한 풍경은 사인펜 점묘나 작은 색종이 모자이크로 제작된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대낮의 풍경화보다 특히 검은색과 화려한 불꽃의 색이 잘 대비되는 불꽃놀이 풍경에서 더욱 빛났다. 그의 작품에서는 불꽃놀이를 보며 느끼게 되는 경탄과 빛의 스펙터클이 환상적으로 재현된다. 찰나 동안 빛을 내뿜는 국화 모양의 불꽃, 불꽃이 수면에 비친 모습과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머리와 몸 위로 살짝 빛이 비친 모습까지 매우 섬세하게 구현된 연작이 야마시타 기요시를 ‘불꽃놀이의 화가’로 불리게 한 대표작이다.

야마시타 기요시, <불꽃>

일본에서 불꽃놀이가 축제의 꽃으로 자리 잡던 1940~50년대, 그의 작품에는 계절의 감각과 지방색은 물론 그것을 즐기는 자유롭고 순수한 마음도 담겼다. 발길 닿는 대로 방랑하는 자유로운 생애, 순식간에 타오르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일본식 미감의 정점인 불꽃놀이와 다정한 지방 풍경이라는 주제는 패전 후 피폐해진 일본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1950년대에는 도쿄 긴자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일본 화단에서도 얼마간 관심을 얻었지만 이내 사그라졌다. 작가가 아카데미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내 화단에 속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도쿄 전시 직후 국내 순회전이 개최되면서 그의 작품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작가가 지적 장애인이었던 점 때문인지, 종이를 잘게 뜯어 붙인 탓에 다소 거친 질감을 가진 작품의 특성이나 야외를 방랑한 경험 때문인지 ‘일본의 고흐’라는 별명도 얻었다. ‘알몸 대장’이라는 별명은 웃옷을 대강 걸치거나 벗고 다니던 작가 생전 방랑기의 행색을 친근하게 일컫는 이름이다. 그의 이야기는 1980년 후지TV에서 드라마 <裸の大将放浪記(알몸 대장 방랑기)>로 제작되었는데, 한국에서도 <길 위의 화가>(OSB)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적이 있다. 1971년 뇌출혈로 의식을 잃기 전, “올해의 하나비는 어디로 갈까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야마시타 기요시, <불꽃(돈다바야시)>

 

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