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 놈: 인류의 시작>

Super Origin│감독 백승기│주연 손이용, 김보리, 백승기│개봉 2016년 8월 18일

 

제목과 포스터에서 한 번, 예고편을 보고 또 한 번 터졌다. 이 영화,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웃겨도 되는 거야? 시종일관 실없는 웃음을 짓게 할 <시발, 놈: 인류의 시작>(2016)은 앞서 <숫호구>(2012)로 독립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백승기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영화 <숫호구>(2012)에서 주인공 ‘원준’을 연기한 백승기 감독
유인원 우두머리 역할을 맡은 백승기 감독

백승기 감독은 B급 코미디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주성치나 찰리 채플린, 심형래가 만든 코미디 영화를 즐겨 봤고, 이들을 존경하며 자랐다. 2006년에는 직접 ‘꾸러기스튜디오’라는 ‘C급 무비’ 전문 제작사를 차리기도 했다.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모토를 가지고 언젠가 한 번은 주성치처럼 키치한 무성영화를 만들겠노라 다짐했던 감독. 그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와 장 자크 아노의 <불을 찾아서>(1981)를 보고 대담한 연출에 반해 직접 원시시대가 배경인 영화를 만들기에 이른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이하 <시발, 놈>)은 4만년 전, 이 땅에 나타난 인류 최초의 이야기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영화다. 언어가 없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에 인물들은 표정과 행동만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영화는 본래 무성영화에 가까웠다. 하지만 감독은 내부 시사회에서 영화에 담긴 의도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음을 깨닫고 재편집에 매달린다. 총 5번의 내부 시사회, 2년간의 편집을 거쳐 개봉한 영화는 감독이 직접 쓴 자막에 어설픈 영어 내레이션이 들어가 있다.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영어 문장이지만, 이게 알아들으면 은근히 웃긴다. 열심히 발음을 굴리는 감독의 목소리도 한몫 한다. 놀라운 것은 내레이션에 번역 자문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시발놈’을 연기한 배우는 손이용이다. 인천예술고등학교 미술과 선배로 알고 지내던 감독의 추천으로 영화에 뛰어들었고, <숫호구>(2012)에서 주인공의 아바타 역으로 잘생김(?)을 연기한 바 있다. 본래 그림을 그렸고 한때 패션스타일리스트로 일했던 그는 제대로 연기를 배워본 적도, 배우가 꿈도 아니었지만, 원시인 역을 맡은 이번 작품에서 초반 10~15분간 전라 노출까지 감행하는 열정을 보였다. 또한 대사가 없어도 주인공의 감정을 관객이 다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제작진 역시 감독과 두루 아는 사이다. 이들은 초안부터 감독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협업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에서 유인원 역할로 등장한 배우들도 실은 조감독, 의상감독 등 대부분 현장 스태프다.

<시발, 놈>의 제작비는 총 1,000만 원. 장편 하나를 만들기엔 턱도 없는 액수지만 나름 해외 로케이션까지 다녀왔다. 감독은 저렴한 경비로 광활한 자연을 담아낼 수 있는 네팔 히말라야를 선택했고, 경비 절감을 위해 카메라 한 대, 삼각대 하나만 들고 배우와 단둘이 비행길에 올랐다. 손이용은 언제 어디서든 촬영을 할 수 있도록 등산복 안에 원시인 팬티를 입고 다녔고, 좋은 장소가 나타나면 관광객을 피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옷을 벗고 가발을 쓴 채 연기했다. 폭설이 내리던 설악산에서는 헐벗고 누워있는 배우가 실제 조난객인 줄 알고 등산객이 도와주러 온 헤프닝도 있었다고. 그 밖에도 서해의 굴업, 동네 공원과 야산 따위의 국내 여러 장소에서 촬영하며 정해진 제작비 내에서 가능한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풍경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최소한의 스태프와 장비로 움직였기 때문에 영화는 전면 후시녹음, 100% 더빙으로 만들어졌다.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녹음실 영상과 NG 컷은 즐겁고 화기애애하게 촬영했던 현장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70분의 러닝타임,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들의 실패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태초의 인간은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선 안 되는 것을 직접 먹어본 후에야, 다치면 피가 나고 아프다는 사실을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본 후에야 깨달았다. 사소하고 사적인 경험부터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이 다수의 피해로 이어지는 사회적 갈등까지, 인류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조금씩 성장해왔다. 비단 시발놈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인생은 ‘처음 겪는 일’이다. 영화는 그러니 실패와 좌절에도 결코 주저앉지 말라고 말한다. 태초부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깨지고 부딪히며 나아갈 시발놈(始發者)의 자손들, 파이팅.

<시발, 놈: 인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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