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이 아쉽기라도 한 듯 20세기의 마지막 해 1999년에는 유독 많은 명작이 등장했다. SF 영화의 신기원을 이룬 <매트릭스>, 아카데미 5관왕의 <아메리칸 뷰티>, 반전 영화의 대명사 <식스 센스>, 그리고 독특한 촬영기법의 저예산 호러 <블레어 위치>가 대표적이다. 당시엔 이들에 가려 영화제 수상이나 주목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이후 영화 팬들의 입소문을 타고 뒤늦게 명작 반열에 오른 화제작도 많았다. 이들은 기존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소재나 영상 기법을 도입해 21세기 영화 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지금도 컬트적인 인기를 누린다. 네 편을 선정해 보았다.

 

<파이트 클럽>(Fight Club)

독창적인 소재와 기괴한 풍자로 유명한 작가 척 팔라닉(Chuck Palahniuk)의 소설을 바탕으로, 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튼을 두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오늘날 명감독 반열에 오른 데이비드 핀처의 작품. 당시엔 20세기 폭스가 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낮게 보고 마케팅 예산을 대폭 줄였으나,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가장 논란이 많은 컬트 영화로 자리잡았다. 영화 <이유없는 반항>(1955)과 <졸업>(1967)에 이어 기성 가치관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분노와 불신을 묘사한 계보 영화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영향으로 미국 각 지역에서 실제 파이트 클럽이 결성되었고, 사제 폭탄에 의한 모방 테러사건이 사전에 발각되기도 했다.

영화 <파이트 클럽>(1999) 예고편

 

<매그놀리아>(Magnolia)

전작 <부기 나이츠>(1997)의 흥행에 따라 뉴라인 영화사로부터 재량권을 부여받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펼친 영화다.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는 고독하고 절박한 인물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그들을 따라다닌다. 그가 자란 로스앤젤레스의 밸리 지역(The Valley)에서 대부분 촬영되었고, 필립 베이커 홀, 필립 시모어 호프먼, 줄리앤 무어 등 그의 사단으로 분류되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아카데미, 골든글러브, 그래미에 각 3개 부문 후보로 올랐으나 모두 수상하지 못했다. 대신에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았다. 마지막 장면에 뜬금없이 하늘에서 개구리 비가 쏟아지는 상황은 성서의 출애굽기 8장 2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영화 곳곳에 ‘8:2’라는 숫자가 등장하는 이유는 이와 관련 있다.

아카데미, 골든글러브, 그래미 후보에 오른 주제곡, 에이미 만의 ‘Save Me’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작가 찰리 카우프만(Charlie Kaufman)가 쓴 기발한 상상력의 시나리오에 대해 많은 영화사들이 거절했지만, 뮤직비디오로 유명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자신의 영화 데뷔작으로 관심을 보이면서 마침내 빛을 보았다. 영화사 간부들이 “수많은 배우 중에 하필 존 말코비치인가?”고 반문하며 내키지 않아 하던 작품이지만,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아카데미 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다른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라는 다소 엉뚱한 소재로, 인간의 욕망과 자아 성찰이라는 철학적 담론을 담았다. 이 영화로 주목받은 찰리 카우프만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차기작 <어댑테이션 >(2002), 미셸 공드리 감독의 데뷔작 <휴먼 네이처>(2001)와 <이터널 선샤인>(2004)의 극본을 쓰며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반열에 올랐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1999) 예고편

 

<쓰리 킹즈>(Three Kings)

영화는 이라크와 미국 간 걸프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내용은 블랙 코미디에 가까우며 액션, 드라마, 코미디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후일 <노예 12년>(2013)으로 오스카 각색상을 받은 데이비드 O. 러셀의 <Spoil of War>을 바탕으로 했다. 흥행에 자신이 없던 영화사가 예산을 쥐어짰지만, 로튼토마토 신선도 94%의 호평을 받으며 박스오피스 1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대신 주연을 맡은 조지 클루니는 제작 현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며 러셀 감독과 계속 설전을 벌였고 심지어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같은 해 <존 말코비치 되기>로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스파이크 존즈가 배우로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즈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신랄한 반전영화”라 치켜 세웠다.

영화 <쓰리 킹즈>(1999) 예고편